멜랑콜리아(melancholia)
  세상의 모든 창조는 우수의 감정으로부터 비롯했다. 철학, 예술, 문학은 물론 의학, 과학도 그러했다. 각 시대마다 멜랑콜리아, 혹은 멜랑콜리(melancholy)와 같은 이슈가 여럿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개인사를 넘어 사회, 시대로 이어진 우수의 감정은 예술가에게 있어 상상력과 천재성을 강화시켜주는 주요 요소였다.  노정하의 사진은 우수(憂愁)로 가득하다. 이런저런 우수의 감정이 촉촉이 녹아 있다. 시대의 우수라기보다는 개인적 우수로 이된다. 노정하의 사진영상작업에는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또 볼 수도 없고 담을 수도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잊어버린, 잃어버린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절대적상실감으로부터 그의 예술은 시작되었다.
  노정하의 우수와 그리움은 초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초상작업은 타인은 물론 자신의 모습을 상당수 포함하고 있다. 아니 대부분이 자신이다. 아이던 어른의 모습이던 타인을 통해 이미지화 된 자신에 다름 아니다.누구보다 자의식(自意識), 자기애(自己愛)가 그만큼 강하다는 반증이다. 사진 중심의 개인초상은 최근 영상설치작업으로 이어지면서 집단초상의 양상을 보인다.  노정하 초상작업의 힘은 독특한 연출이다. 사진 속 이런저런 소품, 배경들과 함께 등장하는 노정하는 중세시대의 여인, 중세시대의 공주를 연상시킨다. 전생이 공주였냐는 질문에 그저 웃음으로 답한다. 자신을 가둔 액자도 중세풍이다. 중세풍의 드레스와 고전적인 프레임, 검자주색으로 주조된 화면은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이를테면 노정하식 바니타스(vanitas) 모티프인 셈이다. 타고난 문학적 능력과 관심, 소양, 가능성이 유감 없이 드러나고 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사진 속에 드러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 사진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정하의 사진에는 노정하가 있다. 그가 실재하는 노정하든 아니든 간에 노정하가 있다. 그의 작업이 리얼리티를 매개로 하고 있음이다. 노정하는 사진 속에서 자신을 찍고 있다. 명백한 자기 초상으로서의 사진이다. 카메라의 렌즈와 자신의 눈, 관객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흔히 사진은 자연의 거울이라 말한다. 노정하의 사진은 자신의 숨겨진 열정,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자신을 비추고 있다.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때론 계획적인 노골적 시선으로 정조준하고 있다. 자신을 겨냥하고, 자신에게로 초점을 맞추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자 관심, 규명하려는 노력이다.
  노정하의 작업은 질문이다. 예술, 혹은 사진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사진을 통한 자기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다. 그는 인간의 삶과 운명에 관하여 묻고 있다. 배워왔고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견딜 수 없는 고독과 슬픔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질문이다. 과연 행복은 실존하지 않는 개념에 불과한 것인가. 삶은 인간의 고통을 측정하는 과정,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일 뿐인가. 예술과 삶이 서로 닮은 이유가 그 때문인가. 노정하의 사진 속에 담긴 우수의 감정은 노정하의 철학, 인생관이 내재되어 있는 삶의 그림자에 다름 아니다. 그의 작업은 이를테면 긍정적인 멜랑콜리인 셈이다. 
 
  이번 수상전에서 만나는 노정하의 작업들은 1999년 초창기 작업으로부터 2012년 신작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어제, 오늘과 인간의 미래적 운명을 드라마틱하게 풀어내고 있다. 노정하의 작업은 우수가 예술과 직결된다는 멜랑콜리아 담론을 돌아보게 한다. 근자에 집중하고 있는 영상과 디지털 사진 작업이 지금까지의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지 지켜볼 일이다. 
2012년<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전> 서평, 박천남/ 성곡미술관 수석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