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통로가 된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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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통로가 된 연인
축복의 통로가 된 연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아주 특별한 향연
노정하의 <The One>은 인간과 공간 그리고 그 유기적 관계에서 형성된 생명 에너지에 관해, 또한 그 절묘한 조합으로 완성된 특별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의 시선은 서울, 베니스, 북경, 뉴욕, 프라하, 베를린 등, 전 지구적으로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바로 그 향연의 순간들을 펼쳐 보인다.
첫눈에 보이는 것들은 일정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과 우리가 머무는 공간들이다. 모두 잔잔한 일상에 대한 기록이라 하겠다. 햇살 가득한 정원과 그 속에서 평화로운 휴식을 취하며 영감을 좇는 어느 예술가, 그 자체가 역사인 건축물과 역사의 찰나를 공유하는 사람들, 종교 건물의 성스러운 영역과 공간을 가득 메운 심상의 언어들, 일상의 삶 속에 흩어져 있는 무수한 교차의 공간과 부지불식간에 쌓인 소통의 흔적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좀더 세심히 들여다보면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눈이 이해하는 특정 장소의 어느 한 시각만을 돌이키려는 시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는 어느 풍경과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장면들은 문득 낯선 환영(幻影)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 그럴까. 작품 속 대상들로 시선을 옮기면 이들은 모두 살아있는 듯 부유하고 실루엣을 꿈틀거리면서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경계가 불분명하여 다소 몽환적이기까지 한 이 장면들은 그래서인지 멈춰있는 사진이라기보다는 천천히 움직이는 영상물을 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마치 스스로의 존재감을 인지한 뒤 생체 에너지를 발화하면서 화면 앞을 향해 움직이며 조금씩 자신들의 이야기를 웅얼거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노정하는 바로 이 특별한 순간, 즉 눈에 보이는 차원과 눈에 보이지 않은 차원 사이의 다자간 교감과 이야기를 마법사처럼 사각의 프레임 안에 고스란히 담아내는 독특한 작품들을 제시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공간은 단순한 3차원의 형태가 아니라 인간이 뿜어내는 에너지와 유기적 관계를 이루면서 매순간 그 에너지를 차곡차곡 축적해온 살아있는 그 무엇이라고 본다’고 하는 작가는 인간과 공간이 공유하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억과 그 시간으로 인해 형성된 존재의 본질이나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노정하의 <The one>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시간의 축적을 통해 배양해온 생명의 기운을 발산하는 순간, 그리고 또다시 타자의 에너지를 흡입하는 경이로운 순간에 대한 기록이며, 그와 동시에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들에 대한 덧없음, 아련한 그리움에 대한 감상을 포착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섬세한 주제를 생생하게 가시화하기 위해 노정하는 자신이 손수 만든 핀홀카메라(pinhole camera)를 이용했다. 렌즈 대신 작은 바늘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적은 빛으로 이미지를 형상화하기 때문에 핀홀카메라는 오랜 시간동안 빛에 노출해야 하는 특징을 지닌다. 이로 인해 움직이는 대상을 명확하게 담기에는 부적합하다는 표현상의 제약이 있으며 멀고 가까운 거리를 모두 초점화하기 때문에 기존의 원근법적인 시각보다 다소 평면적이다. 또한 둥근 바늘구멍에서 투과되는 빛이 필름의 사각 모퉁이에까지 미치지 못해 검게 발화되는 독특한 효과가 나타난다. 이와 같은 핀홀카메라만의 고집스러운 특성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 모든 현상을 활용하여 시간의 축적과 에너지 교차의 은유적 표현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탁월하게 전달하고 있다.
사진이 본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매체라는 점에서 시간의 축적이라는 역사성을 담지하는 데에는 최적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핀홀카메라의 장시간 노출이라는 특성은 특별한 존재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데에 있어 그 철학적 타당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또한 피사체의 움직임을 그대로 받아들여 형태 변화의 추이를 감지하고 에너지 흐름의 교차를 비유적으로 전달하는 효과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모든 작품에는 관찰자의 시선이 담겨져 있는데 화면의 네 귀퉁이를 감싸고 있는 타원형의 검은 프레임은 보는 이의 동공 역할을 하고 있어 그들만의 특별한 향연에 관람자를 동참하게 하고 이를 증언할 수 있게 했다.
노정하는 결국 현실의 모든 존재와 비존재를 귀히 여기는 작가이다. 현실의 존재들과 비존재들이 지니는 자신들만의 역사와 비하인드 스토리를 존중하고 현실조차 또다시 역사가 되어 사라지는 서글픔을 덤덤히 이해하려는 작가의 시선은 그래서 지금 이 순간과 이 공간과 그 안의 모든 존재와 비존재들이 특별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에서 무의미하게 존재했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이제 서로에게 창조이자 부활이며 현실이자 미래이다. 그 특별한 순간마다 노정하와 그의 핀홀카메라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최정주/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과큐레이터,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