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너머의 이야기 : 하나의 감성, "The One'

  일상의 풍경을 통해 그 너머를 유영하는 작가 노정하, 그녀의 작품은 극도로 개인적이다. 사진에서 보여지는 것과 존재하는 것의 양면성을 절묘하게 변주하면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여과 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작업하는 작가는 핀홀 카메라의 특성을 극대화하면서 개인적 풍경을 만들고 있다. 그녀의 사진에서 보이는 것은 보여주려는 것의 반대 항처럼 작동한다. 핀홀 카메라로 찍은 도시와 자연 풍경은 사진적인 재현성을 넘어 감성을 흔드는 특별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노정하는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 안에 존재하는 강박적인 욕망을 드러내며 일상의 풍경을 스스로의 삶이 오롯이 드러나는 '개인적 풍경'으로 전환한다. "베케트나 카푸카의 공식에 따르면 움직임의 너머에는 부동이 있다. 서 있는 자 너머에는 앉아있는자가 있고, 앉아 있는 자 너머에는 누워있는 작가 있고, 차팀내는 사라진다. 진정한 곡예는 동그라미 속에서 하는 부동의 곡예이다." 라는 들뢰즈(감각의 논리)의 연금처럼, 그녀는 부동의 곡예를 핀홀 카메라의 작은 상자에서 반복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사성 없는 텅 빈 풍경의 평화롭고 흐릿한 이미지와는 달리,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지는 그 기억 속에만 존재한 강렬한 외침이 그녀의 작품 안에 있다. 이 에네지 넘치는 알 수 없는 실체가 노정하 작품의 핵심이다.

  작가는 핀홀 카메라를 들고 자유로운 여행작의 시선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런 일상 속에서 우연찮게 맞닥뜨리는 특정한 장소의 존재감에 매로되면서 공간과 사람사이의 관계, 그 곳에 축적되 기억들, 그리고 그 곳을 특별하게 만드는 에너지에 관심을 갖는다. 작가는 바로 이런 유기적 에너지가 만들어 내는 특별한 존재감으로부터 "The One" 시리즈를 시작했다. 작가가 핀홀 카메라를 사용한 것 은 이ㅓㄴ이 처음은 아니다. 작가는 2000년부터 "Nowhere but Anywhere"시리즈에서 핀홀 카메라를 사용하면서 초점이 불분명한 핀홀 카메라 특유의 이미지를 제작하고 있다.

  작가는  왜 실상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기존의 카메라가 아닌, 흐릿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핀홀 카메라를 택했을까? 초점이 맞지 않는 뿌연 이미지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더떤 인식체계일까? 작가가 세상을 보는 방법은 사물을 하나의 사실로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희미한 이미지가 선동하는 기옥 속을 유영하면서 그 안의 특별한 감성을 포착하는 것이다.  작가가 추구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감성으로 채워진 여행이다. 삶의 속도에 밀린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의 신화에 매료되어 있다. 일상의 풍경에서 벗어나 날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한 작가는, 오히려 풍경을 핀홀 카메라에 기록하면서 욕망의 파편을 재구성한다. 조용하지만 역동적인 아이러니로 가득한 이번 작품은 마치 작가의 초상처럼 낯설지 않다.

  <기록과 욕망>

  노정하의 사진은 자연스런 실상을 기록하지 않는다. 본래 사진은 렌즈 앞의 현실을 이차원적으로 재현해서 그대로 떠낸 흔적이다. 사진과 실상은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소급 불가능한 순간들을 포착한다. 핀홀 카메라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찍는다'는 행위는 순간의 감정을 느끼고 소유하려는 존재론적인 욕구에서 비롯한다. 강렬한 순간은 물리적인 행위, 곧 '찍고 기록하고 소유한다'에서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재현의 도구를 넘어 실존적인 순간들을 수유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는다. 즉 사진을 찍는 목적은 세상과 자신의 관계성을 유지하는 데 있다. 그녀의 사진 이미지는 개인적 감성의 장이자, 세상과의 연결고리로서 작동하는 퐁격 너머의 이야기이다.

  <알레고리로 사진을 읽다>

  노정하의 사진은 일종의 알레고리인데, 두 가지 의미로 그녀의 작품을 해석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카페 풍경, 운하, 건물, 사람들 등  하나의 일상적 풍경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 내부에는 사적인 공간에서만 허용되는 감정과 욕망이 이차적 의미로서 내재되어 있다. 이처럼 그녀의 작품은 이미지 속에 숨겨진 의미를 마치 암호처럼 해독해서 이해해야 하는 재미를 준다.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는 고정되어 있는 사진 이미지보다 새로운 읽을 거리를 주는 그녀의 작품에는 롤랑 바르트가 언급했던 '스튜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 공존한다.

  "스튜디움은 나른하 욕망, 잡다한 흥미, 분별없는 취향 따위의 지극히 넓은 영역이다.(...) 사진은 위험한 것인데 스튜디움은 그것을 코드화시키으로서 사회에 환원해 준다.(...) 푼크툼은 세부, 다시 말하면 부분적인 대상이다 또한 푼크툼의 실례를 보여준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무방비 상태로 찔릴 때의 적나라함으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다"(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 중에서)

  한가로운 거리 풍경, 은은한 색조, 흐릿한고 불분명한 초점 등은 사진 이미지의 일번적인 정보에 관한 스튜디움(studium)'으로 읽히고, 그 내면의 감성은 코드화할 수 없는 작은 요소지만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상처 같은 흔적 푼크툼(punctum)'으로 다가온다. 뾰족한 창처럼 우리의 눈을 찌르고, 우리를 상상하게 하고, 우리의 시선을 붙잡아 고정시키는, 사진 전체에 흐르는 하나의 감성은 알 수 없는 '슬픈 욕망'으로 다가온다. 타인에게는 평범한 풍경의 잔상으로만 느껴질 삶의 디테일은 작가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푼크툼, 즉 일상과는 다른 상처로 해속되기 때문이다.

  노정하의 작품은 핀홀 카메라가 제공하는 풍경 사진 뒤에 과거와 현실이 뒤섞이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욕망의 변주곡이다. 그래서 그녀의 사진을 풍격사진으로 범주화 할 수 없다. 풍격화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잔재에 층실한 사진 이미지이자, 풍격 너머에 있을 '하나의 감성'에 한 발짝 다가서는 문이기 때문이다.

                                         신혜경/ 사진비평, 기획작, 2010년